한국 현대사 공권력에 의한 집단학살 사건등과 그 역사적 교훈
한국 역사에는 여러 차례 공권력에 기반한 집단학살등 아픈 사건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대부분 정치적, 이념적인 대립으로 인해 일어났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슬프고 가슴아픈 사건임으로 다시는 이런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반추해보고 각성해보고 성찰해보아야 할것입니다. 기억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나치만행을 기억하자는 에파랑교수의 염원이 담긴 명언)을 가슴에 새기며 대한민국의 한사람으로서 역사속의 만행으로 희생당한 모든분들에게 머리숙여 명복을 빌면서 또한 대한민국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나아가는데 모든국민이 강한의지를 가지고 머리를 맞대고 국민적 각오를 새로이 다듬치 않으면 안되는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작금에도 일부국가에서 아직도 독재자들의 정치폭력이 자행되고있고 어린이등 양민이 무차별 학살되는 국지적 분쟁과 전쟁(이스라엘,팔레스타인전쟁)과 (러시아 으크라이나전쟁)등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 확고한 자위적이며 튼튼한 넘볼 수 없는 강한 첨단 국방력 구축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될것입니다, 또한 내부적인 정치 민주적인 시스템이 없으면 독재적 정치 지도자가 정권유지적 차원과 자국의 경제문제 은페를 위한 출구를 모색하기위해 전쟁불사라는 정치적 대의 명분을 내세워 국민을 전쟁참사의 도가니로 몰아 넣게 됨을 볼 수 있는 일이라 할것입니다, 이상황에서 여러 다양한 참사가 발생 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정치이념 때문에 학살을 자행한다는 것은 소가 웃을 일입니다,
각설하고 정치가 국민을 잘살게하고 행복하게 하는 일이 목표인데 ,, 옆나라 다른국가의 국민들도 행복하여야 우리 국민들도 행복해짐은 당연한 일일진데 작금의 국제정세는 평화의 시스템인 UN이 제기능을 상실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구촌 경찰국가이자 초강대국인 미국의 자국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 선언 조치는 궁극적 장기적으로 각자도생하라는 의미를 읽어야할것입니다.. 군사력, 경제력, 과학기술력이 없으면 (인구가 소멸되면 나라자체가 존재할수 없듯이) 냉엄한 국제정치에 휘둘려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전쟁의 수렁 한복판에 서있게 될지 모른다는... 이를 빙자한 거대담론 명분으로 독재자가 출현하여 히틀러처럼 세계를 죽음의 아수랑으로 몰아갈수 있음을 우리는 역사에서 확인할수 있습니다,
나치독일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는 나치정당을 반대하는 내부정적을 잡아 고문하고 처행해 수많은 나치에저항한 국민들이 소리도 없이 죽임을 당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도 미얀마등 수많은 군부독재자 국가에서 아직도 이런일이 자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대한민국이 이를 피할수 있는 방법은
1, 강고하고 확고한 민주적인 시스템으로 헌법 및 제반 국가시스템을 AI 시대에 맞게 개혁해야합니다 , 어떠한 경우에도 독재자 출현의 명분을 근본적으로 없애야할것입니다.
2,모든 국민들의 기본적인 경제생활을 보장해야 하고 경제정의를 실천하여 빈부격차를 줄여야만 국민들의 분열을 막을수 있고 이에 편승한 포퓰리즘 독재자를 예방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3,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국도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독자적이고 자위적인 강한 국방력이 없이는 국가가 존재할수 없음을 (과거 일제의해 대한민국이 찬탈당했던) 사실을 또렷히 기억하고 있어야할것이며 이를 절대 간과해서는 안될것입니다,
4, 대한민국이 새롭고 강력한 세계평화국제기구의 중심으로 나서야 할것입니다.. k-POP 한류문화가 세계의 중심으로 정상에 올라있듯이... 강대국들의 개별이익적 관점을 떠나 세계가 공존번영할 수 있는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국제정치를 정의와 정도로서 확실하게 구현할 수 있는 AI시대에 맞는 국제기구를 새로이 반드시 만들필요가 있다할것입니다,, (역사학자 유발하라리 제언)
5, 전세계 각국가, 각국민이 경제적 배고품에서 근본적으로 해제되어야합니다,, 앞서 말씀드린것처럼 어려운 국가의 기본적인 경제생활을 보장하지 않으면 내부적 소요 폭동사태가 유발될것이며 이 명분을 이용한 독재자가 출현될것입니다, 이에따라 이웃나라도 난민으로 시달릴것이며 현재있어서도 유럽각국은 아프리카와 중동의 분쟁국가의 난민으로 여러 어려움에 처해있음은 (경제가 좋을때는 난민들이 3D업종에서 경제를 받처주는데)(경제가 어려우면 퇴출 1순위로 이를 방치시 이슬람 극단주의와 연계한 사회문제가 대두)됨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선진제국은 과거 아프리카드의 노예제도, 중동의 거의 강탈적 원유시추등으로 피식민 국가를 마구 유린하여 내부적 적대심이 크다할 것입다. 이를 갚을 새시대가 온 것입니다,,,
저개발국가들을 선진국으로 끌어올리는 세계적 경제개발기구 설립돟 함께 모색해야할 시점이
온것입니다...
@ 이지구촌에 더 이상 , 독재자, 전쟁, 집단학살 이라는 단어등이 없어지도록 전세계인이 머리를 맞대고 마음을 비우고 서로를 배려하여 이지구별을 대우주 무릉도원의 반짝이는 별로 반드시 만들어 나아갑시다,,
,한국의 현대역사에서 일어난 아픈 사건을 마음에 새겨서 교훈으로 삼아야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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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 4·3 평화운동 (1948년)
4·3 평화운동은 남한에서 일어난 민주주의와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이었으나, 정부는 이를 공산주의 세력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국가공권력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주 주민 수십만 명이 학살당하는 참상이 벌어졌습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제주에 이 엄청난 아픔이 서려있음을 방문객들은 희생된 분들을 위해 기도해주시고 참배해 주시길을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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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순사건(麗順事件) 개요
1. 사건 개요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부터 27일까지 전라남도 여수 · 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의 반란과 여기에 호응한 좌익계열 시민들의 봉기가 유혈 진압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제주 4·3 사건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약 1만 1천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습니다.
2. 주요 경과
10월 19일: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킴.
10월 20일: 반란군, 여수 · 순천 점령. 좌익계열 시민들, 봉기에 가담.
10월 21일: 정부군, 여수 · 순천 공격 개시.
10월 27일: 여수 · 순천 완전히 함락. 반란 진압 완료.
3. 피해 규모
사망자: 약 1만 1천 명 (정확한 숫자는 불분명)
주요 피해: 민간인 학살, 집단 처형, 성폭행, 약탈 등
4. 사건의 영향
이승만 정부, 국가보안법 제정 및 강력한 숙군 조치 단행
남북 대립 심화, 한국 사회의 극심한 분열 가속화
5. 현재 진행 상황
2008년 5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여순사건을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인정
2019년 7월,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 설립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작업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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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보도연맹 학살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정부는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여진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했습니다. 대상에는 남한 내 좌익 전향 단체인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들뿐만 아니라, 단순히 좌익 성향으로 의심받는 사람들까지 포함되었습니다. 학살 사망자 수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수만 명에 달한다고 추정됩니다.
단순히 식량배급을 해준다고 가입하여 학살당한 양민들이 너무 많이 희생되었다는 일을
정말 가슴 아픈 일이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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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전교도소 학살 사건 (1950년)
인민군 대전교도소 학살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와 대전·충남 지역에서 좌익으로 몰린 민간인들이 우리 군과 경찰 등에 의해 집단 학살당한 사건입니다.
사건 개요:
발생 시기: 1950년 7월 초
장소: 대전교도소 및 대전·충남 지역
희생자: 약 7천여 명 (정확한 수는 밝혀지지 않음)
주요 가해자: 대한민국 국군, 경찰, 반공단체
사건 경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남한에 진격한 인민군은 대전교도소를 점령하고 수감자들을 석방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국군이 대전을 수복하면서, 석방된 수감자들 중 일부는 다시 체포되어 학살당했습니다.
또한, 대전·충남 지역에서는 좌익으로 몰린 민간인들이 우리 군과 경찰, 반공단체에 의해 집단학살되었습니다. 학살의 명분은 대부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여 처단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개인적인 원한이나 정치적 이유로 이루어진 경우도 많았습니다.
사건의 영향:
인민군 대전교도소 학살 사건은 한국전쟁 중 발생한 가장 참혹한 학살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남한 사회에 큰 충격과 상흔을 남겼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한국 사회의 이념적 대립과 정치적 폭력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사건에 대한 논쟁:
일부에서는 인민군이 철수하면서 수감자들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일부에서는 국군과 경찰이 학살을 주도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사건의 의미:
대전교도소 학살 사건은 한국전쟁의 비극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전쟁의 참혹함과 이념적 대립의 위험성을 일깨워줍니다.
또한, 모든 인간의 생명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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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1950년)
한국전쟁 중, 충청북도 영동군에서는 미군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소속 군인들이 피난민들을 북한군으로 오인하여 학살했습니다. 학살 사망자 수는 200여 명에서 최대 400여 명에 달한다는 추산이 있습니다, 양민들을 적군으로 오인하여 미군 전투비행기로 집단 할 것은 전쟁이 얼마나 많은 양민을 죽게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할것입니다,
지금도 노근리 현장에는 총탄세례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고 노근리 평화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니 지나는 길이라면 꼭 들려서 참배해 주시길을 염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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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국민방위군 사건: 6.25 전쟁의 참혹한 상흔 1950‘12-51. 2월
개요
국민방위군 사건은 한국전쟁 중 발생한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참사 중 하나입니다. 1950년 12월부터 1951년 2월까지 발생했으며, 당시 정부의 무책임과 부패로 인해 수십만 명의 국민방위군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배경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대한민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전쟁 초기 북한군의 침공으로 서울을 비롯한 남부 지역이 함락되자, 정부는 급박하게 국민방위군을 창설했습니다. 국민방위군은 14세 이상 45세 이하의 모든 남성을 대상으로 징집되었으며, 총 50만 명 이상의 병력이 모집되었습니다.
사건 경과
정부는 국민방위군에 대한 적절한 지원정책을 아끼지 않았으나 그 과정에서. 식량, 의류, 군수물자가 부족했으며, 훈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국민방위군 병사들은 혹한의 겨울을 견뎌야 했습니다.
더욱 문제가 된 것은 일부 국민방위군 간부들의 부패였습니다. 이들은 군자금을 횡령하고, 식량과 의류를 암거래하는 등 비윤리적인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이러한 부패로 인해 국민방위군 병사들의 처우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결과
결과적으로, 수십만 명의 국민방위군 병사들이 이동중 아사, 동상,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알 수 없지만, 무려 5만 명에서 9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부패자 간부들은 모두 적발되어 사형당했지만 엄청난 젊은이들이 희생당한 기막힌 사건이 아닐수 없다할것입니다.
영향
국민방위군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깊은 상흔을 남겼습니다. 이 사건은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며, 정부의 무책임과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국민방위군 사건은 한국전쟁의 승리를 위한 희생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평가
국민방위군 사건은 한국전쟁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이 사건은 전쟁의 참혹함을 일깨워주고, 정부의 책임과 윤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게합니다. 또한, 국민방위군 병사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는 큰 교훈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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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거창 양민 학살 사건 (1951년)
한국전쟁 중, 경상남도 거창군에서는 국군 제11사단 소속 군인들이 마을 주민들을 집단학살했습니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알 수 없지만, 700여 명에서 최대 2천여 명에 달한다는 추산이 있습니다. 학살의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군인들이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인 마을 주민들을 처단하기 위해 저지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을주민들은 밤에는 게릴라들이 산에서 내려오니 죽지 않으려면 밥을 해줘야했고 낮에는 국군이 들이닥처 인민군 게릴라에게 부역을 했다고 어린이 부녀자 노인할 것 없이 계곡으로 몰아서 모조리 집단학살한 사건입니다.
이럴수가 있는 일인가! 전쟁은 결국 물불을 안가리게되고 공권력이 지시라며 광인이 되게 한다는 증거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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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조봉암 등 정치적 판결로 사형당한 사건: 진보당 사건
조봉암 의원의 사형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법살인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조봉암 의원은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간첩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1959년 7월 31일 사형되었습니다.
1. 진보당 사건 개요
발생: 1958년
배경: 이승만 정권의 권력 유지를 위한 야당 탄압
주요 내용:
진보당: 사회주의 성향의 정당으로, 평화통일을 주장
조작된 혐의: 간첩 조직과의 연루 혐의 조작
사형 선고: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 8명
사형 집행: 1959년 7월 31일 (조작된 재판 후 20시간 만에 집행)
무죄 재판: 2011년 1월 대법원,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 8명 무죄 판결 (52년 만에 무죄 확정)
2. 조봉암 의원의 삶과 업적
생애: 1899년 출생 - 1959년 사망
경력: 모스코바대학 유학
대한민국 초대 내각 농림부 장관
제2대 국회의원
진보당 창당 (1957년)
업적:
농민 운동과 노동 운동 지도
평화통일론 제시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
3. 진보당 사건의 의의
민주주의 탄압: 이승만 정권의 권력 유지를 위한 억압적 사건
인권 침해: 사법 절차 위반, 고문, 자백 강요 등 심각한 인권 침해
역사적 교훈: 민주주의와 인권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사건
4. 진보당 사건에 대한 평가
사법살인: 조작된 재판과 사형 집행으로 인해 사법살인으로 평가
민주화 운동: 진보당 사건은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미침
역사적 재평가: 2011년 무죄 판결 이후 진보당 사건에 대한 재평가 진행
5. 추가 정보
관련 인물:
사형 집행된 인물: 조봉암, 양이섭, 김상진, 이석형, 김원봉, 김병채, 김상진, 최인식
@ 정치적 사법살인으로 정적을 제거한 사건으로 기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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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4.19 의거 (1960년)
개요
4.19 의거는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학생과 시민들이 이승만 정권의 부정 선거와 독재에 맞서 일으킨 민주화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으며,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배경
1950년대 후반 이승만 정권은 장기 집권을 위해 부정 선거와 권력 남용을 반복했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학생과 시민들은 점차 민주화에 대한 요구를 높였습니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자유당의 부정 선거가 드러나자, 학생들은 부정 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요구하며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경과
4월 11일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시작한 후,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시위대는 경찰의 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시위를 벌였으며, 4월 19일에는 수십만 명의 시위대가 서울 시내를 가득 메웠습니다. 결국 이승만 정권은 4월 26일 하야하고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결과
4.19 의거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종식시키고 대한민국에 민주주의를 가져온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5.16 군사 쿠데타로 인해 민주주의는 잠시 후퇴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19 의거는 한국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이정표로 기억되고 있으며, 한국 사회에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확산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4.19 의거의 의의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수립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확산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기념
4.19 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4월 19일을 '4.19 민주주의의 날'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서울특별시 종로구에는 4.19 의거를 기념하는 4.19민주묘지와 4.19혁명기념관이 있습니다.
@ 희생자 내역
국립4·19민주묘지: 총 1,510명 (1997년 기준, 사망자 및 실종자 포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총 2,931명 (2004년 기준, 사망자, 부상자, 피살자, 투옥자 포함)
4.19혁명희생자유족회: 총 2,721명 (2024년 7월 기준, 사망자 및 가족 포함)
이 숫자들은 각 기관의 조사 기준과 방법에 따라 다르니 참조 바랍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전국적으로 일어나 정부를 실각시킨 민주화혁명으로 세계사적으로도 인정받은 시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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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민청학련 사건 사형에 대한 정보 요약 1974,
1. 사건 개요
발생: 1974년
배경: 박정희 유신정권에 대한 반대 운동 진압
주요 내용:
민청학련: 허위 조작된 가상의 조직
사형 선고: 8명 (인혁당 관련자)
사형 집행: 1975년 4월 9일 (대법원 판결 후 20시간 만에 집행)
무죄 쟁의: 2010년 9월 30일 대법원, 이철 전 코레일 사장 등 4명 무죄 판결
(36년 만에 무죄 확정)
2. 사건의 의의
민주화 운동 탄압: 군사 정권의 권력 유지를 위한 억압적 사건
인권 침해: 사법 절차 위반, 고문, 자백 강요 등 심각한 인권 침해
역사적 교훈: 민주주의와 인권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사건
3. 추가 정보
관련 인물:
사형 집행된 인물: 여정남, 김병곤, 김선남, 김진수, 박종철, 문정국, 이태영, 최인식
무죄 판결된 인물: 이철, 백낙청, 최형필
4, 피해자에 대한 명예 회복과 국가적 책임: 사형 집행된 이들에 대한 명예 회복과 국가의 책임을 어떻게 다할지에 대한 논의 필요
5. 민청학련 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이며, 민주주의와 인권의 발전을 위해 기억해야 할 사법살인의 대표적 정치적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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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광주 민주화 운동의 의의와 사망자 수
1. 광주 민주화 운동의 의의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와 전남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민주화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당시 군사 정권의 부당한 통치에 맞서 시민들이 일으킨 자발적인 항쟁이었으며,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됩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의 주요 의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민주화 열망: 군사 정권의 권위주의 체제에 맞서 시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일어난 운동입니다. 이는 한국 사회에 민주주의 가치가 확산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인권 존중: 군사 정권의 인권 탄압에 맞서 시민들이 인권 존중을 요구한 운동입니다. 이는 한국 사회에 인권 의식이 확산되는데 기여했습니다.
광주와 전남 지역이 민주화를 위해 하나로 뭉친 운동입니다. 이는 지역 간 화합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사회 정의 실현: 군사 정권의 부패와 지역 불평등에 맞서 시민들이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운동입니다. 이는 한국 사회의 건전한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2. 광주 민주화 운동의 사망자 수
광주 민주화 운동의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를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망 154명, 행방불명 70여 명, 부상 3,208명, 기타 1,628명 등 총 5,060명
@ 광주광역시: 사망 163명, 행방불명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 101명, 부상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
이처럼 다양한 기관에서 조사한 사망자 수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수백 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부상자와 행방불명자를 포함하면 수천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3.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억과 명예 회복
광주 민주화 운동은 한국 현대사의 지대한 비극이었지만, 동시에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숭고한 희생이었습니다. 이 운동을 통해 얻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기억하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국가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며, 관련 연구와 자료 발굴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운동의 의미를 되새기는 다양한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권력을 쟁취하기위한 명분을 만들기위해 광주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을 공수부대등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하여 엄청난 희생적 참사가 야기되었음을 역사가 증언하고 있는 일입니다, 억울한 희생적 죽음이 더 이상 이땅에서 지속 되어서는 안될것입니다..
다시는 한국사회에 군부가 등장하여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그런 무참한 학살이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되지 않도록 모든국민은 민주적 의식문화를 앞당기고 탁월한 민주제도 시스템을 만들어 내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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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한국 역사에는 다양한 집단학살 사건들이 다수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이념적 대립과 정치적 폭력은 결코 어떠한 명분으로도 절대 용납될 수 없다는 것
모든 인간은 존엄성을 지닌 개인이며, 그들의 생명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
역사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고 진실을 끝까지 올라르고 정의롭게 밝혀야 한다는 것
우리는 이러한 교훈을 기억하며, 더 평화롭고 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불행한 역사앞에 가슴을 저미며 진심을 가지고 간절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각 역사연궈소 및 고증 관련자료 참조...
칼럼리스트 김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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