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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공항해외여행안내

청주공항 오사카고베교토 (6월8일-10월8일) 진행여행 전국예약센터 월드라이프여행사 김부국대표 친절상담 010 5461 3247

청주공항 오사카고베교토 (6월8일-10월8일) 진행여행 전국예약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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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상인들의 도시, 오사카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오사카가 진정한 상업도시로서 가지는 면모는 시장에 가면 바로 볼 수 있다. 대형할인마트에 전통시장이 밀리는 건 오사카도 마찬가지. 그에 대한 갖가지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일본에서 가장 긴 상점가인 덴진바시 시장이다. 오오강에 연결된 덴진바시에서 시작하여 남북으로 2.6km.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긴 것은 아니지만 걷고 나면 괜히 뿌듯할 만한 거리다. 그것을 장점으로 내세워 덴진바시에서 만든 제도가 바로 완보상장. 오사카 덴만구 사무소에서 증명서를 받아 완주 후 Aloyon 케이크점에 제출하면 완보상장으로 교환해준다. 물론 반대방향 완주도 가능하다. 이곳에 시장이 형성된 이유는 오사카 덴만구 때문이었다. 이곳에 참배하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열린 가게들이 모여 시장이 된 것이다. 시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학문의 신으로 모시는 학문의 신사인 이곳은 947년에 세워졌다. 이곳에서 매년 열리는 마츠리도 유명하다. 일곱 개의 번지로 나누어진 상가는 제각각 다른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식료품, 잡화, 의료품, 찻집 등 600여 개의 점포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외에도 덴산 오카게칸이라 하여 프리마켓을 하거나 전시를 하거나 장사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해두고 있다.

 

상업도시로 꽃 피다, 오사카성

오사카가 상업도시로 활발하게 꽃 피게 된 데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의 역할이 지대하다. 우리에게는 임진왜란의 주범으로 미움받는 인물이지만, 오사카에서는 거의 신으로 추앙받으며 사랑받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시 천황이 있는 교토로 집중되어있던 경제력을 오사카로 가지고 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상인의 힘을 믿었고, 전국의 유명하다는 상인들을 모두 오사카로 불러들였다. 교토의 후시미 상인, 오우미 상인, 오사카의 히라노 상인, 사카이의 사카이 상인들은 도요토미가 마련해준 성 아래 동네, 현재의 추오구 혼마치도오리 지역으로 집단이주했다. 그곳을 센바라 칭했는데, 그 뜻은 선착장이다. 운하를 물류에 적절히 이용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 덕분에 상인들은 그곳에서 전국의 시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오사카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오사카성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었다. 1583, 히데요시는 혼간지 절터에 거대하고 호화로운 성을 축성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대단한 규모로 눈길을 끌었지만, 현재 이곳은 히데요시가 지었던 성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여러 차례의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의 공습으로 부서지고 재건하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과 몰락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그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했다. 그가 죽은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는데, 오사카성은 마지막 남은 후손 히데요리가 끝까지 버텼던 곳이기도 하다.

 

1615년 오사카성을 함락시킨 오사카 여름전투는 현재 오사카 성에 미니어처로 재현되어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후 오사카성을 고쳐 지었으나 원래의 호화로움을 재현할 생각은 없었다. 정권을 잡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를 떠나 도쿄(당시 에도)를 거점으로 삼았다. 그 바람에, 일본의 정치, 경제의 중심은 도쿄로 옮겨가고 오사카는 그 위세 당당했던 지위를 잃게 되었다. 지금도 오사카의 상인들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무척 싫어하는 것은 그 까닭이다.

오사카는 우리나라 교포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쌓은 오사카 성()이 유명하다. 이 밖에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절인 시덴노 사(四天王寺) 등 많은 유적이 있다. 상업도시 답게 없는 물건이 없을정도로 물산의 집결지이고 과거 모든 물품은 이곳을 통해 일본각지로 퍼저나갔다, 또한 음식이 발달하여 맛이 기막힌 각종음식의 천국이 바로 오사카다,,,

 

 

고베-----------------------------------------------------------

4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고 우리나라와 기온이 비슷하다. 그러나 전형적인 해양성 습윤기후이기 때문에 여름에는 습도가 높아 무더운 날씨가 이어진다. 반면 겨울은 비교적 따뜻한 편이며,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 5년간의 1월 평균기온은 6.1, 8월 평균기온은 28.6이다.

초기에 개항한 항구 도시답게 서양문물의 영향을 받은 특산품이 많다. 푸딩, 와인, 커피, 양과자 등 서양의 제조기술을 습득해 디저트나 음료가 발달했다. 또한 예전부터 명성이 자자한 고베 소는 뛰어난 마블링을 자랑하며 세계적으로도 이름이 나 있다.

고베에는 세련된 쇼핑지가 많다. 하버랜드를 중심으로 바닷가에는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쇼핑몰이, 시내에는 유서 깊은 상점가가 많다. 1868년 고베항 개항 이래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며 자연스레 상점가가 발전하게 되었고 대지진 이후 도시를 재정비하면서 고급스럽게 정돈되었다. 특히 프랑스 마르세유를 본 따 조성한 메디테라스에서 쇼핑을 하다보면 마치 유럽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고베에는 서양 음식점이 유난히 많다. 고베항 개항 이래 많은 외국인이 거주하면서 양식이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스테이크나 하이라이스, 커틀릿을 주 메뉴로 하는 가게가 제일 많다.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 유럽의 음식은 물론 중국, 한국, 홍콩, 인도, 대만, 러시아, 브라질 요리 전문점도 있다. 또한, 서양음식문화의 영향을 받아 빵과 케이크가 발달했다. 1940년대에 문을 연 일부 베이커리는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1995117일 일본관측 사상 최대의 고베대지진이 발생하여 6300명이 사망하였다,

아직도 당시상황을 그대로 둔곳으로 메모리얼파크가 있다,

 

교토-----------------------------------------------------------------

마치 영화와 같은 일본의 옛 모습이 중첩되는 교토. 1,100년 간 수도 역할을 했던 오랜 역사를 증명하는 듯 수많은 유적들을 품고있는 교토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디,. 거리마다 크고 작은 사찰과 신사들이 즐비하여 문화유적과 자연의 조화가 몹시 아름다운 한국의 경주같은 고품격 역사도시라 할 것이다..

거북이처럼 느릿한 여행을 즐기기 좋은 도시. 천년고도의 역사가 강물처럼 흐르는 유적, 발길 닿는대로 걸어도 옛 정취가 묻어나는 거리 곳곳의 풍경마저 매력적인 교토를 감상하며 둘러본다.

교토가 '천년 고도'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역사책을 보여줄 수도 있다. 도시 곳곳에 백년 넘은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보여주며 그 증거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수백 년 전의 삶과 직업을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큼 강한 설득력이 있을까? 교토를 정말로 놀라운 도시로 만드는 것은 기온(祇園)의 게이샤들일지도 모른다.

 

잘못된 통념과 달리 기온은 홍등가가 아니라 수백 년간 여성 예술인들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거리다. 또한 교토에서는 게이샤가 아니라 게이코(芸子)라는 지칭으로 이들을 부른다. [게이샤의 추억(Memoirs of a Geisha)]은 콜롬비아 대학에서 일본사를 공부한 아서 골든이 이와사카 미네코 등 기온에서 게이코로 살았던 사람들을 인터뷰한 뒤 그것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국내에는 장쯔이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소개되었는데, 주인공인 사유리는 가난한 어촌 마을에서 태어난 소녀로, 기온의 '노부 오키야'에서 게이코로 자라난 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격동의 시간과 사랑의 아픔을 겪어간다.

대학 도시인 교토는 바다 너머 조선의 청년들을 부르기도 했다. 1923년 정지용은 모교인 휘문고보의 교비생으로 도시샤 대학 영문과를 다니게 된다. 그리고 교토와 고향인 옥천을 오가며 시작에 열중해 조선과 일본 양쪽의 문단에 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일본 <근대풍경(近代風景)>에는 예민한 언어 감각으로 순간의 이미지를 그린 '카페 프란스', '바다', '갑판 위'와 같은 작품들이 실렸다. 지금 들여다보아도 지극히 현대적인데, 1930년대 우리 문단의 총아였던 김기림은 "한국의 현대시는 지용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20년 뒤 도지샤는 또 다른 조선의 천재를 맞이한다. 바로 윤동주. 1942년 도쿄 릿코 대학 영문과에 들어갔다가, 6개월 뒤 도지샤 대학 문학부로 옮기게 된 것이다. 그는 선배인 정지용처럼 대학 시절을 즐길 수는 없었다.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의 시기였고, 몰락 직전의 일제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다. 그는 19437월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2년 형을 언도받았고, 후쿠오카 형무소로 간 뒤에 돌아올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정지용 역시 해방 전후와 6.25 전쟁 시기의 이념 분쟁에 휘말려 북으로 사라지게 되고, 남에서는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 두 사람의 시비는 도지샤 대학의 교정에 나란히 앉아, 그들이 겪은 비극의 깊이만큼이나 또렷한 언어를 빛내고 있다.

 

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게 희생당한 조선인의 코가 묻힌 곳.

일본에 있는 귀 무덤

일본 교토에 가면 높이 약 9m에 이르는 귀 무덤이 있습니다. 이름은 귀 무덤이지만 실제로는 코 무덤이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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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에 있는 조선인의 한이 서린 귀 무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시 임진왜란 전쟁이 별다른 성과 없이 계속 이어지자 부하 장수들을 독려하기 위해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어 전리품으로 바치라고 명령해요.

 

영수증에 몇 명을 죽였는지 적어 주며 그 공을 인정해 주었지요. 수량을 적은 확인서까지 보내니 일본의 장수들은 서로 더 많은 공을 세우기 위해 조선의 백성들을 죽이기 시작했어요.

 

얼마 후, 귀는 두 개여서 수를 부풀릴 수 있다며 코를 베어 오라고 명령을 내렸어요.

 

2. 산 사람의 코까지 베어가다

원칙적으로 일본의 장수들은 전쟁터에서 상대했던 조선 군인의 코를 잘라 보내야 했지만 더 많은 공을 인정받고 싶어서 일반 백성들의 코도 마구 베어갔어요.

 

그리고 코를 소금에 절인 뒤 일본으로 보냈지요.

 

오사카 항에 도착한 코와 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교토로 실려가 땅에 묻혔어요. 그것이 오늘날 귀 무덤이라 불리는 이총입니다.

 

귀 무덤인 이총은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어요.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바로 교토에 있는 이총이지요.

무려 조선 백성 126천여 명의 코와 귀가 잘려 무덤에 매장된 거예요. 죽은 사람뿐 아니라 산 사람의 코를 베어가는 일까지 발생했지요.

 

3. “에비!”는 귀와 코를 자른다는 말

혹시 어른들이 아이들이 위험한 행동을 하려 할 때 에비!” 하고 겁주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나요?

 

이때 에비는 귀와 코를 뜻하는 한자어인 이비(耳鼻)에서 나온 말로, 오늘날까지도 어린아이에게 주의 줄 때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조선인의 한이 서린 귀 무덤이 존재하고 있다...

 

너무 가슴아픈 침략의 역사적 아픔이라 즐거운 여행일정에서는 뺏지만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도록 교토에 가면 찾아가서 가이드에게 요청하여 참배시간을 가지면서 강건한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우리모두 최선을 다해야한다는 다짐을 굳게 하는 시간을 갖게 되길을 염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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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새롭고 강력한 정치 경제 외교력을 강구해 나가자!

 

이웃나라 일본과 잘 지내야 하건만 위안부문제, 징용문제, 독도문제, 교과서 왜곡문제 등으로

일제침략의 강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일본 우익정치인들의 반성없는 자세를 개탄하지 않을수 없는 일이다,

근세사에 들오와 일본은 적극적인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경제, 군사강국을 만들어 주자학과 유교이념에 집착하고있는 공론적인 선비의 나라 조선을 마구 유린하였다,

원자탄을 맞아 2차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은 오히려 피해국이라며 자국의 국민을 호도하면서 다시금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나가기위해 미국과 손잡고 군사대국으로 나아가고 있다,

국력이 약해진 미국은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기위해 일본의 군사력 강화를 지원하고 있다,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대한민국은 국가의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국주둔군에 맡기고 있다,

전쟁이 나면 대한민국의 군대지휘를 미군사령관에게 맡겨야할 운명에 있다,

2012년에 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에 되돌려준다는 노무현대통령이 받아놓았으나 보수정권으로 넘어가면서 계속지연되고있는 상황이다, 만약 한반도에 전시상황이 벌어진다면 미국은 당연히 먼저 가까운 일본자위대를 한반도에 투입시킬 것은 자명한 일이다.

미군지시라는 명분하에 한반도를 지킨다는 뜻으로 일본군이 들어와 치안을 담당할수 있다는 일부의 군사전문가와 외교학자들의 우려와 걱정을 무시할수 없는 일이다.

일본과 대등한 기술력과 1인당 구매력에 있어 일본국민을 능가하는 경제력을 가지고있는 대한민국은 이제 보다 자신감있는 통찰력있는 정치 외교력을 펼처나가야 할시점이다...

과거 일본과 미국은 일본은 한국을 먹고 미국은 필리핀을 가진다는 가스라테프트밀약을 맺은적이있다, 625직전 미국은 애치슨라인을 설정하여 미국의 방위선을 일본만을 지킨다는 설정으로 북한을 오판토록하였다, 월남전쟁에서 패한 미국은 닉슨독트린을 통해 아시아각국가는 스스로 국가를 방위하라고 선언하였다,,,

미국은 전세계 각 군사요충지에 100여개의 군사기지를 만들고 30만명을 내보내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팍스아메리카 정신으로 세계의 경찰국가의 존엄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미국 젊은이들 3만명이 사망하면서도 한국을 지켜주었고 전쟁후 무상원조를 통해 한국경제 발전의 가적을 이루게해준 혈맹이며 강력한 동맹이다...

그 고맙고 감사함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일이다, 미국과 동맹관계를 지속하여 북한핵을 견제하는 지렛대로 삼아야한다는 것은 국민의 안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모선이다,

하지만 미국은 이슬람의 독재자들과 결탁하여 수많은 이익을 챙겼고 그원한으로 911테러를 당했다는 정치학자도 있다, 중남미에서도 미국과 서방의 탐욕적 자본주의로 경제약탈을 통해 종속이론이 등장하고 좌파정부가 연이어 들어서는 부메랑적 오류를 범했다는 사실을

미국의 진보 정치학자들의 논지를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진보적 정치인 문재인 대통령도 북한과의 대화와 평화노선을 위해 그토록 노력했지만 김대중정권때처럼 저질르고 보는 담대함이 부족해서인지, 마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세심한 간섭때문인지 개성공단 사무실이 폭파당하는 역설적 뒷치기를 당하고 말았다,

우주 로켓 나라호를 쏴 올릴 때 그기술 제공을 미국은 철저히 외면하였다...

러시아가 제공하는 로켓기술을 배워서 쏴올린 것이다.

지금도 한국 미사일 사정거리에 대해 일일이 미국에 허락을 받고 개발해야한다...

미국 무기를 연간 8조이상씩 사둬야하고 그 보수유지비 또한 엄청난 일이다.

미국정치 뒤에 숨어있는 미국군산복합체의 파워는 상상을 초월한다,

매년 4만명씩 총기사고로 죽는데 총기규제는 말뿐인 미국정치 현실의 장벽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미국의 핵우산속에서 사실상 대한민국이 독자적으로 외교력을 전개하는데는 엄청난 한계가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좌파측 일부 정치 학자들은 사실상 한국은 미국의 속국이자 식민지가 아니냐고 지적하고 있는 것에 무엇이 문제인지를 이제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할 것이다,

북한핵과 미사일을 견제한다는 사드도 내면에는 중국의 안마당과 러시아 동부의 미사일 및 군사기지를 들여다보기위해 들여왔음은 상식이다...

중국이 사드배치에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중국의 가차없는 경제제재는 한국경제에 천문학적인 피해를 가져다 주었고 아직도 그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윤석열정부의 일본과의 선제적 실리추구 외교는 사실상 평가할만할 일이고

북한핵에 대응해야한다는 핵개발 의지를 표명한것도 여러 포석을 깔고 얘기한것이라 판단된다, 국제정치란 그야말로 냉정한 파워게임이고 사실상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적도 우군도 없다할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G2국 속에 치이고 헤메지말고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강력한 국가의 위용을

만들어나가 아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강력한국가를 만드는데 있어 통큰 과감한 승부수를 던저야할 시점이 아닐수 없다,,

칼럼리스겸 월드라이프여행사 대표 김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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